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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 속의 정원 본문

SN Fic/스네릴리

추억 속의 정원

다럄 2018. 5. 21. 23:00

추억 속의 정원

세브릴리 


BGM - Jonny Greenwood's "House of Woodcock"

https://www.youtube.com/watch?v=bT_XjcdgT6g


 

버려진 정원을 가꾸자고 말한 사람은 릴리였으나, 가장 정을 많이 쏟은 사람은 세베루스였다. 작은 삽으로 황폐해진 땅을 뒤집고 그 안에 잠든 생명을 깨웠다. 페투니아가 애지중지 키우는 꽃들을 데려와 그곳에 심었다. 작은 화분에 갇혀있던 꽃들은 넓은 땅을 만나자 기다렸다는 듯 커다랗고 화려한 꽃잎들을 피웠다. 릴리가 투니에게 혼난 보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잠깐의 침묵 뒤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웃었다. 릴리와 세베루스는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은 뒤에 씨앗들을 부지런히 심었다. 릴리는 비가 내리면 뿌리를 내리고 잎사귀를 내밀 거란 노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세베루스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며칠째 뜨거운 햇볕만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원망스레 바라보던 세베루스가 구석에 떨어진 커다란 잎을 가져와 릴리의 머리에 얹어주었다.

 

릴리, 너무 무리하지 마.”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세브.”

 

세베루스가 눈을 피하며 손끝으로 얼굴을 긁적거리자 릴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얀 구름이 느릿하게 걸어와 심술 맞은 태양을 가렸다. 맑은 하늘이 만든 그늘에서 두 사람은 노인이 일러준 대로 씨앗을 하나씩 심었다. 세베루스가 씨앗을 덮은 흙더미를 칭얼거리는 아기를 재우는 손길처럼 다정하게 도닥였다. 수돗가에서 물을 퍼와 물뿌리개에 담았다. 릴리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손끝으로 그에게 물을 튀겼다. 소매로 얼굴을 닦은 세베루스의 얼굴엔 싫은 기색 하나 없었다. 단지 이 비밀스럽고 평화로운 시간이 끝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물뿌리개를 아래로 기울이자 투명한 물방울들이 땅 위로 떨어졌다. 젖어가는 땅을 멍하니 바라보던 세베루스가 릴리의 눈치를 살폈다.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말을 건넸다.

 

우리가 이 정원을 언제까지 가꿀 수 있을까?”

, 호그와트에 입학하면 지금처럼 하긴 어려울 거야.”

그렇겠지.”

 

시간이 흘러 두 사람이 호그와트로 떠난다면 정원은 다시 황폐해질 것이다. 세베루스 혼자 가꾼 곳이라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곳엔 릴리와 함께한 시간이 가득했다. 정원이 황폐해진다면 그 시간까지 퇴색되는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세베루스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 정원을 살피겠지만, 릴리는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미래엔 영롱한 빛이 가득했으니까. 조금 기운이 빠져 말없이 마른 흙을 적시며 자리로 옮기는데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너 또 우울한 생각 하고 있었지?”

, 그게 무슨 말이야?”

잠깐 앉아봐.”

 

아까 전까지 점심 만찬 자리였던 대리석 의자에 앉았다. 릴리가 흙 묻은 손을 털더니 바구니에서 보온병을 꺼냈다. 뚜껑을 돌려 열자 미지근한 김이 올라왔다. 작은 잔들에 차를 나눠 담아 세베루스에게 건네며, 친구의 손등을 도닥였다. 씨앗을 심었던 때처럼. 멍하니 정원 풍경을 보던 세베루스가 릴리와 눈을 마주했다. 여름날 숲속보다 더 푸르른 녹색 눈이 그를 반겼다.

 

세브, 꽃이 시들어도 우리가 정원을 가꿨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아. 난 기억력 꽤 좋거든. 우리가 어떤 꽃을 심었는지 다 기억할 거야. 너는 어때? 여기가 다시 볼품없어져도 그 기억까지 다 잊어버릴 거니?”

 

세베루스가 고갤 저었다. 릴리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를 위로했다. 정원의 담장을 넘은 바람이 두 사람의 머리칼을 스쳐 지나갔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세베루스의 머리칼을 릴리가 귀 뒤로 넘겨주었다. 두 뺨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달아올랐지만 릴리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제 비만 오면 되겠다, 그치?”

그러게.”

세브, 그 전에 저쪽에 뭘 좀 심자. 뭘 심을까?”

……백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 탓에 릴리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잔을 내려놓고 다시 모종삽을 손에 든 릴리가 씨앗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베루스는 저녁에 다시 돌아와 정원 중앙에 아름다운 백합을 심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는 그랬다. 평화롭게 모든 게 흘러갔다.

 

그녀에게 그 기억이 추억이었는지 세베루스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숨이 꺼져가는 순간 소년의 두 눈을 보면서 추억 속의 정원을 떠올렸다.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작은 손으로 씨앗을 심고 흙을 도닥이던 그때를 기억해냈다. 릴리, 넌 어땠니? 마지막 숨을 뱉으며 세베루스는 소년에게 필요한 기억들을 전해주었지만, 그 추억만큼은 건네지 못했다. 숨이 끊어지고 영혼이 검은 눈 너머로 사라졌다. 아득해지는 시선 속에서 세베루스는 정원의 문고리를 잡았다. 열쇠가 철컥 소리를 내며 돌아가자 문이 열렸다. 그곳엔 그때와 같은 꽃들이 있었다. 그녀를 닮은 영롱한 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