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스네] 수취인 불명
수취인 불명
[해스네]
전쟁 후 살아남았지만 짧은 행복만 누리다 간 세베루스와 그를 그리워하는 해리
01
세베루스, 교수님이 언젠가 신기루처럼 사라지리라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을 몰랐어요. 교수님, 내가 무얼 잘못했나요? 아침에 너무 귀찮게 굴었나요?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했었나요? 자주 교수님을 혼자 두어서 그런가요? 제발 가르쳐주세요. 교수님은 무엇이든 알잖아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잖아요. 기다릴게요. 답장 주세요.
02
오늘 트래펄가 광장에 갔다가 세베루스를 봤어요. 아니, 닮은 사람이요. 어찌나 똑같던지 그 자리에서 이름을 부를 뻔했어요. 들숨과 날숨으로 들썩이는 가슴 하며, 책자를 넘기는 손짓, 멀어지는 발걸음 모두가 교수님이었어요. 홀린 듯이 쫓아갔다가 동료들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죠. 감정을 깨달았던 그때처럼 심장이 아팠어요. 알죠? 전에 제가 말했던 쥐어짜듯 꾹 옥죄는 그 느낌이요. 그 사람이 한 걸음 한 걸음 멀어질 때마다 심장이 참 아프게 뛰었어요. 세베루스, 너무 보고 싶어요. 교수님과 나눴던 대화, 함께 했던 시간 모두가 그리워요. 기다릴게요, 답장 주세요.
03
서재를 정리하다가 사진을 찾았어요. 언젠가 내가 졸라서 받은 교수님들 사진이요. 활짝 웃는 교수님들 사이에서 혼자 부루퉁해 있는 교수님을 보다가 오랜만에 사람답게 웃었어요. 사진 속 교수님은 날 흘기듯 바라보다 다시 엄숙한 표정을 지었어요. 내 농담을 못마땅해하다 눈길을 돌렸던 그때처럼. 아무튼, 오랜만에 스네이프 교수님을 만나서 기뻤어요. 교수님도 그런가요? 내 사진을 보면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나요? 아니, 느끼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돌려받지 않아도 돼요. 기다릴 테니 우리가 함께했던 저택으로 돌아와요. 사랑해요, 세베루스.
04
오늘 마법부에 갔다가 교수님 얘길 들었어요. 사람들은 아직도 교수님 과거를 욕하고 손가락질해요. 내가 입술이 부르트도록 열변을 토했는데도. 전에도 말했지만 단 한 번도 교수님 과거를 원망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과거를 가졌으니까요. 어린 세베루스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해요. 세베루스……혹시 사람들이 나와 함께 있는 교수님을 보고 손가락질했나요? 우리가 자주 갔던 레스토랑에서, 입을 맞췄던 바닷가에서, 시간을 보냈던 극장에서 그런 부당한 일을 당했나요? 그들이 교수님을 모욕하고 조롱했나요? 그래서 날 떠난 건가요? 교수님이 괴로운 순간에 내가 없어서? 제발 말해줘요. 교수님이 원한다면 난 그들에게 비난을 돌려줄 수 있어요. 교수님이 바란다면 난 그들을 지옥으로 보낼 수도 있어요. 교수님이 원한다면 난 뭐든 할 수 있어요.
06
한동안 편지를 못 했네요. 오러사무국 일로 바빴어요. 끔찍한 전쟁이 끝났는데도 어둠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기승이에요. 알아요, 교수님은 이런 얘길 싫어하죠. 내가 항상 다쳐서 돌아왔으니까요. 안타깝게도 또 다쳤어요. 붕대로 대충 상처를 감싸긴 했는데 쓰라리네요. 교수님 마법약 한 방울이면 금방 나을 텐데. 교수님 대체 어디에 있나요? 난 교수님이 필요해요. 무심하게 약을 내밀던 그 사람이 필요해요. 잠든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작게 한숨을 쉬던 그 사람이 필요해요. 돌아와요, 교수님. 제발 돌아와요.
07
우리가 처음 깊은 밤을 보냈던 그 날을 기억하나요? 어스름한 새벽 사이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요. 날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던 두 눈동자를 아꼈어요. 탐욕스러운 온기로 가득한 몸을 조심히 쓰다듬던 손길을 좋아했어요. 터져 나오는 내 욕망을 책하지 않고 끌어안았던 교수님을 사랑했어요. 혹시 그날 내 행동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건가요? 그렇다면 땅이 젖어 들고 시간이 화석이 될 때까지 잘못을 빌게요.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고 쉼 없이 속삭일게요. 그러니 제발 돌아와요.
08
점심을 먹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교수님을 귀찮게 한 것에 비해서 사랑한단 말을 많이 안 했다는 거요. 그런데 사랑한다고 말을 할라치면 교수님은 항상 빵조각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잖아요? 그러니까 이것만큼은 내 잘못이 아니죠? 날 원망하지 않는 거죠? 세베루스, 돌아오면 매 순간마다 속삭여줄게요. 사랑해요.
09
마지막 편지를 내려놓은 헤르미온느가 눈을 질끈 감았다. 편지는 초라한 모습의 산이 되어 책상에 쌓여있었다. 소파에 널브러진 그를 론이 부축해 침실로 데려갔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안타까워 바로 눈길을 거뒀다. 좀 더 빨리 알아챘어야 했다. 교수님께 편지를 쓰겠다고 해맑게 웃던 그를 내버려 둬선 안 됐다. 꾸깃꾸깃해진 편지들을 모아 서랍에 고이 넣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갤 드니 책상 위에 놓인 사진 속 어떤 이가 슬픈 눈을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신기루처럼 사라져 헤르미온느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본 것을 의심했다.
세상을 등지기 전 교수는 그녀에게 해리를 부탁한단 편지를 남겼다. 짧은 글이었지만 행간을 통해 교수의 바람을 알게 되었다. 그가 광인이 되어 자신을 서둘러 따르지 않길 바랐다. 잔인하지만 그가 살아가기 위해선 현실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었다. 마침 침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시 사진을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의 바람이 그렇다면 원망을 받을지라도 그를 세상에 붙잡아 두겠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탁해진 시선과 만났다. 숙취 때문인지 이마를 부여잡고 힘들어하던 해리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어깨를 그러쥐고 눈을 마주했다. 론도 해리 옆에 앉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해리, 교수님은 돌아오시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리타 스키터의 허무맹랑한 기사를 믿는 거야?”
“제발 현실을 똑바로 봐. 네가 지난겨울 차가운 땅에 누굴 묻었는지 기억해내라고.”
길게 휘어져 있던 입가가 볼품없이 추락했다. 그 사이로 처참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무는 해처럼 무너지는 두 눈을 보던 론과 헤르미온느가 해리를 끌어안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서로를 끌어안았던 그때처럼 체온을 나누고 숨결을 확인했다. 그들은 해리가 떠나지 않길 바랐다. 울음을 토해내는 해리에게 교수가 남긴 유언을 전했다.
내게 태양처럼 찾아와 빛이 되었듯 세상에도 그런 존재로 남아 다오.
10
헤르미온느가 교수님의 유언을 말해줬어요. 빛이 되라고 했지만 나는 아직 모르겠어요. 하지만 노력해볼게요. 교수님, 아니 세베루스. 이제 술 많이 안 마실게요. 밤거리를 걸으면서 엉엉 울지도 않을게요. 비 오는 날 당신을 그리워하지 않을게요. 맞아요, 이제 당신을 보낼 거예요. 그래도 추억은 갖고 있어도 되죠? 얼마 되지 않는 그 기억들마저 보내야 한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거예요. 책상에 놓인 사진, 편지들처럼 빛이 바래고 낡겠지만 내겐 영원히 소중한 보물일 거예요. 사랑해요, 세베루스. 빛으로 살다가 당신에게 태양처럼 돌아갈게요.